예술계 특수성 반영 없는 정책으로는 문화예술계 성폭력은 해결되지 않는다


#MeToo 운동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2016년 10월 ‘#오타쿠_내_성폭력’을 시작으로 미술, 디자인, 문학, 사진 분야 등 많은 분야의 예술인들이 자신이 겪은 성폭력을 용기내어 고발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발들은 사회의 무관심 속에 명예훼손과 무고죄와 같은 보복성 고소로 잊혀져갔고, 피해자뿐만 아니라 대리인들과 조력자들도 피폐해져갔다. 예술계 내 성폭력을 대처하는 어떤 시스템도 없었기에 가해자들은 반성도 없이 너무도 쉽게 예술계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2017년 2월 여성문화예술연합에서 문화체육부와 여성가족부에게 전달한 요구사항을 성실히 시행했더라면 보복성 고소로 인한 피해가 이 정도로 심각하지 않았을 것이며, 가해자들이 당당하게 돌아올 일도 현저히 적었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 정부 부처의 졸속 대응을 보며 이와 같은 일이 올해에도 다시금 반복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여성문화예술연합은 2017년 1월 결성되었다. 문학, 미술, 영화, 디자인, 전시 기획, 사진, 출판 등 총 7개 분야 아홉 단위가 모여 예술계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고자 문화체육관광부, 여성가족부 등 정부 부처에 지속적으로 의견서를 제출했으며, 예술계 성폭력 실태조사, 문체부 내 성폭력 전담 기구 설립,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징계성 조치, 예술계 성폭력 예방 교육 의무 실시 등 실질적 대책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1년 동안 여성문화예술연합은 문화체육관광부의 ‘실행하겠다’는 답변과 ‘문체부에서 그 일을 할 근거가 없다’ ‘예산이 없다’는 답변 사이에서 지쳐왔다. 도종환 문체부 장관은 장관 취임 후 이번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예술계 성폭력 대책을 세우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없었다.

2018년 서지현 검사의 #MeToo 와 최영미 시인의 #MeToo 를 기점으로 연극계에서 봇물 터지듯 #MeToo 운동이 이어졌고, 각계의 권력자에게로 확산되고 있다. 문체부는 여론과 국회의 압박이 커지자 지난 1년간 여성문화예술연합이 요구했던 정책들을 이제서야 실행하겠다고 2월 20일에 발표한 상황이다. 언론에 보도된 기사만 보면 문체부는 필요한 정책들을 잘 실행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성문화예술연합이 문체부로부터 듣고 있는 얘기는 ‘가해자의 공적 지원금에 대한 제한 조치는 할 수 없다’, ‘신고는 여가부의 기존 기관에서 하면 된다’, ‘기존 기관들의 예술계 특성에 대한 이해 부족은 여성문화예술연합이 도와서 하면 된다’, ‘조사는 수사기관이 아니라서 할 수 없다’ ‘근거조항이 없다’ 등 회피적인 답변들 뿐이다. 게다가 2017년에 실시한 예술계 성폭력 실태 시범조사에 대해서는, 조사 문항을 작성하고 조사 대상에 대해 자문을 했던 여성문화예술연합에조차 제대로 된 분석결과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 이런 무책임하고 관성적인 태도를 볼 때 문체부가 과연 예술계 성폭력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의심이 든다. 문체부는 지난 정권에서 블랙리스트를 적용하여 예술지원에 정치적 억압을 행한 전력이 있다. 그렇다면 처절한 반성으로 이번 예술계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 문체부의 책임을 통감하고 겸허히 예술인들의 목소리를 듣고 예술계 성폭력 해결 시스템을 만드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문체부는 예술계 권력자들의 성범죄에 일정 책임이 있다. 젠더 감수성 없는 지원금 체계는 남성 중심적 예술계 시스템을 강화했으며, 성폭력을 저지르고 있는 예술계 권력자들에게 국가 지원금을 지속적으로 제공함으로써 이들의 권력을 강화해주었다. 연극계만 예를 들어도 지금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은 국립극장장, 서울시극단장, 세종문화회관 이사장, 국립대학인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수를 역임했으며 그밖에도 극단과 공연에 대한 지원금을 집중적으로 수혜해왔다. 최근 국립극장장 최종 후보에 올랐던 김석만 교수는 예술계 성폭력 대응을 논의하는 위원회라고 문체부에서 발표한 ‘성평등 문화정책 위원회’의 위원이기까지 했다. 권력자가 성범죄자인지도 모르고 공적 지원금을 주고 공공 예술기관의 수장을 맡기고 국립대학의 교수직에 임용하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문체부는 어떤 대책을 갖고 있는가?

예술계는 공적 지원금이 많이 투입되는 곳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경영지원센터, 예술인복지재단, 서울문화재단을 비롯한 지역 문화재단, 지자체 등을 통해 문화예술사업 등으로 공적 지원금이 투입된다. 이 문제에 대해 문체부는 확실하게 징계할 수 있는 시스템을 책임 지고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국가의 예술정책을 관할하고 공적 자금 집행을 결정하는 정부 부처로서의 책임이다. 현재 법률적 근거가 없다면 국회와 협조해 근거 조항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국회와 정치권에 말씀 드린다. 성폭력 문제에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으며 이념진영이 따로 있을 수 없다. 1년 동안 예술계 성폭력 해결에 미온적이었던 국회와 정치인은 예술계 성폭력을 정쟁에 이용하지 말고, 문체부와 장관에 대한 비판을 진영논리로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 국회는 정부의 정책에 대해 철저히 감사하고, 필요한 입법을 조사하여 적극적으로 입법 활동을 하길 바란다.

시민단체와 여성단체에 말씀드린다. 작년과 달리 예술계 성폭력 사건에 연대의 목소리를 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정책을 제안하는 데 있어 여성 예술인들의 목소리를 듣고 존중하기를 당부 드리는 바이다. 일부 시민단체와 여성단체들은 여성 예술인들의 운동방향을 충분히 이해하거나 소통하지 못한 채, 문체부에 별도의 창구가 필요 없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가해자가 예술계에 복귀를 못하게 예방하는 일이 우리 활동에서 가장 큰 목표 중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체부의 성폭력 신고 창구 개설은 가해자에 대한 공적 지원금과 공적 지위 부여를 중단하고 예방하는 시스템과 연계하기 위해 필요하며, 하나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동안 예술계는 반성폭력 정책의 사각지대였다. 성폭력 예방교육이 없었고, 예술계 성폭력 실태조사도 없었으며, 성폭력 성희롱을 신고할 예술계 창구도, 그것을 조사하고 해결할 기구도, 가해자에 대한 행정적 제재 방안도 없었다. 시스템이 전무한 상태에서 새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 시점이다.

1년이 넘게 외면해온 정부가 대통령과 장관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예산과 실효성을 제대로 점검하지도 않고, 예술계 성폭력 특수성을 반영할 장치를 마련하지도 않고 성급하게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예술인들은 1년이 넘게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도 신고하지 않는 신고센터, 신고해도 어떤 해결도 없는 창구를 기다린 것이 아니다. 정부 부처는 제대로 된 정책을 만들도록 해야한다. 콘트롤타워를 맡은 여가부장관은 문체부가 예술계 성폭력 해결 시스템을 실효성 있게 만들도록 강력하게 견인해야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예술계 특수성을 반영한, 실효성 있는 정책을, 제대로 만들어 달라.